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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서재]『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년을 살았다』

2021. 06. 13·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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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년간 매달 말일, 개인 SNS에 그 달에 읽은 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매달 6~ 8 권의 책을 읽는데요, 은퇴 후 독립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하고, 한때는 책을 권해주는 ‘북소믈리에’ 가 되고 싶었습니다. 안젤라의 서재를 통해 작으나마 그 꿈을 미리 이뤄보려합니다. 저만 읽기 아까운 좋은 책,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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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국 런던의 ‘동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책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트 런던은 영국에서 어떤 의미일까? 86년하고도 반년을 한 동네에 살다니 굉장한데! 나도 죽기 전에 이런 책을 낼 수 있을만큼  한 동네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가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진짜 ‘토박이’를 찾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우리나라에서는 그 무엇보다 학군이 너무 중요해서 학령기 아이를 둔 부모들은 교육 환경에 따라 이사를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진학 또는 취업 때문에 서울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동네에서 86년하고도 반년을 더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죠. 아마 그런 현상은 전세계 공통일테니 영국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 본인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스트 런던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사진 작가 ‘마틴 어스본’이 만난 한 노인 ‘조지프 마코비치’의 이야기죠. 오늘은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년을 살았다』를 통해 조지프의 기억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년을 살았다』 마틴 오스본 저/ 출처=예스24

어느 날 스튜디오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마틴의 눈에 커다란 비닐 봉지를 든 조지프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도 조지프는 자주 마틴의 눈에 띄었고 마틴은 조지프의 사진을 찍어 공모전에 출품할 생각으로 말을 걸게 되죠. 조지프는 이스트 런던에서 80년 넘게 살아온 토박이였고, (본인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린 마틴을 붙잡고 “지금 네 스튜디오가 있는 그 건물엔 예전에 칵테일 바가 있었고, 저 커피숍은 예전에는 뮤직홀이 있던 자리였는데”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마틴은 조지프의 동네 이야기에 빠져들어 어느새 공모전은 뒷전이 되고 이스트 런던의 역사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죠. 이스트 런던의 올드(Old)와 뉴(New)를 넘나드는 이 책은 마틴의 사진과 조지프의 기억에 이스트 런던의 변천사가 더해져 너무나 매력적인 포토 에세이로 탄생했습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해 책 속의 사진들이 더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네요.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조지프 말코비치/ 출처=『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년을 살았다』

조지프 말코비치와 이스트 런던의 건물 벽/ 출처=『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년을 살았다』

제가 오늘 이 책을 SPI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려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와 독자 여러분 모두 각자 사는 동네에 대해 책을 낸다면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를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상을 시작하면 어떻게 이 동네(또는 도시)를 관찰할 것인지, 이 동네의 어느 부분에서 나만 아는 모습과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지 자연히 생각해 볼 수 있게 되겠죠. 도시를 관찰하는 좋은 습관을 가져보는 겁니다. 이러한 과정이 인생에 사소한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거고요.

다시 책 속의 이스트 런던으로 돌아가보면, 조지프는 자기가 살던 가난한 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년 시절 친구들과 싸웠던 기억, 길거리 패션, 친구와 연인, 일에 대해 담담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조지프의 이야기와 사진을 보다보면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한 ‘개인의 역사’를 만나게 되어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죠.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현대 예술에 대한 이해가 그리 많지 않은 조지프가 가장 존경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마음속 영웅이 ‘트레이시 예민’이라고 밝히는 내용입니다. 트레이시 예민은 이스트 런던의 혹스톤 광장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낸 예술가이죠. 조지프는 올림픽 경기장 한 가운데서 예전에 그곳에 있던 가구점과 양장점과 뮤직홀을 그리워하며 담담한 개인의 역사를 읊기도 합니다.

내가 만약 조지프라면 우리 동네를 지켜준 내 마음 속의 영웅은 누구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의도 5.16 광장을 없애고 공원을 만들어준 그 당시 서울시장(혹은 그 위의 의사결정권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의도 공원이 없는 여의도를 상상할 수 없는 한 사람이기도 하고 벌써 조성된 지 20여년이 지나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여의도 공원이 주민은 물론 여의도 직장인들에게 주는 유무형의 이익은 정말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길에 나가 태극기를 참 많이 흔들어댔던 것이 떠오릅니다. 요즘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제가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외국의 국가 원수가 김포공항에 내려 청와대까지 가는 길에 시민이 동원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행렬이 여의도를 지날때 사용하던 길이 지금의 여의도 광장 자리였습니다. 조지프가 사는 이스트 런던과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번갈아 가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점. 우리 동네에서도 곳곳에 숨은 과거의 역사와 영광을 찾아보는 것. 제가 이 책을 재밌게 읽었던 포인트이기도 하죠.

5.16 광장 준공식

 

IFC에서 바라본 여의도 공원

 

이외에도 조지프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어느 가족과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장소에서 조지프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 장소에 깃든 86년 동안의 친구, 인생의 추억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죠. 조지프와 마틴은 이 책을 쓰며 꽤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책을 출판하기 전 조지프는 세상을 떠납니다. 마틴은 책 말미에 조지프의 장례식 이야기와 조지프의 실제 가족들을 만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냈죠.

“조지프의 인생은 확실히 쇼디치*와 베스널그린 주변 마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던 곳이다. 세월이 흐르며 이 지역은 변해갔지만, 발을 끄는 그의 특이한 걸음걸이와 아주 조금 짧은 듯한 바지는 내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스트 런던의 대표적인 동네 쇼디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쇼디치(Shoreditch)는 잉글랜드 런던 북동쪽 및 중부에 걸쳐 위치한 지역으로 1800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쇼디치 극장과 음악홀이 유명했습니다. 1970년대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19세기 말까지 쇼디치는 범죄, 매춘, 빈곤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빈곤층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덕분에 임대료가 저렴해 1990년대 후반부터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죠. 2008년경 IT 업계의 신생 기업들이 속속 유입되고 정부가 이스트 런던 테크 시티 구상을 발표하면서 2010년대 들어 기업 수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쇼디치 하이스트리트/ 직접촬영

쇼디치 하이스트리트/ 직접촬영

재밌는 점은 조지프의 쇼디치와 마틴의 쇼디치는 분명 같은 지역이지만 다른 지역이기도 했다는 것이죠. 조지프의 쇼디치는 가난의 상징이었던 반면 마틴의 쇼디치는 많은 영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테크와 아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부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이상한 간극을 메꾸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지프는 마틴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볼 것. 내가 매일 이스트 런던을 어슬렁거리면서 했던 것처럼 낯선 사람을 맑은 눈으로 직접 만나려면 우리 대부분이 갖지 못했지만 모두가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정 수준의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 동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동네는 쇼디치처럼 가난을 탈피하고 부자 동네로 거듭났을 수도 있고, 어떤 동네는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변한 것은 동네이지 내가 아니라는 조지프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가난했던 또는 조금 불편했던 그 시절을 마음 놓고 그리워할 수 있는 관조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매일을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이번 주말에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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